우연히 집어든 책 한권에서 행운을 만나는 그곳

[월요신문 김미화 기자] ‘동네서점’을 생각했을 때 당신이 떠올리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없는 게 없는 대형 서점과, 마우스 클릭 한 번이면 하루 만에 책이 배달되는 현실을 생각했을 때 누군가는 대표적인 사양 업종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누군가는 빽빽하게 들어선 책들로 가득한 ‘예전’ 동네서점을 떠올리며 지루하고 따분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 고유한 개성을 앞세우며 “동네서점을 세련되게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는 곳이 있다. 기존의 동네서점과 차별성을 내세운 ‘세렌북피티’가 그 주인공이다.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위치한 세렌북피티를 찾았다. 세렌북피티는 당인리발전소로 불리는 서울화력발전소에서 양화진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지난 13일 문을 연 서점이다. 이 근처는 간간히 카페나 갤러리, 의류점 등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주택가가 밀집돼 있어 조용한 느낌을 준다. 이런 곳에 서점이 있을까, 하고 걷다보면 ‘당신을 만나게 된 건 우연을 가장한 운명’이라고 적힌 입간판에 발걸음을 멈추게 되고, ‘READ’라는 노란색 문구의 조형물을 통해 세렌북피티를 발견하게 된다.

세렌북피티에 들어가면 얼핏 이곳이 서점인지 카페인지 술집인지 헷갈릴 가능성이 높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인테리어가 잘 된 카페 같은 느낌인데, 곳곳에 서점처럼 책이 진열돼 있고, 한쪽에는 다양한 세계 맥주가 냉장고 째로 자리하고 있기 때문. 책장 너머에는 편안하게 두 다리를 뻗고 책을 읽으라는 듯 침대도 마련돼 있다. 재밌는 컨셉 탓에 이곳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던지자 “사람들이 물어보면 여기는 서점도 맞고 카페도 맞고 술집도 맞다고 말해준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날의 서점은 책만 파는 서점은 없다고 생각한다. 책‘도’ 파는 서점인 것이다.” 세렌북피티의 대표 김세나씨의 말이다.

김씨는 “지금의 서점은 대부분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찾아오는 공간이다. 하지만 나는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비독자가 우연한 기회에 책을 경험해보고, 나아가 구매로까지 이어지는 모델을 꿈꾸고 있다. 서점의 형태를 취하겠지만, 경쟁상대는 다른 서점들이 아니다. 어떤 곳이든 ‘서점’이라는 형식을 취하며 책을 권할 수 있는 게 미래의 서점 모델 아닐까”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미용실에는 뷰티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여성들이 방문하니 그와 관련한 책을 팔기도 하고, 동물병원에서는 반려동물 관련 도서, 키즈카페에서는 아이들 그림책을 가져다 놓고 팔 수 있다. 그렇게 어디든 서점이 될 수 있다는 게 김씨의 설명이다. 일반인들한테 “책을 읽자, 책을 사자”라며 주문하는 것보다 지나가다가 “어, 이거 읽어보고 싶다”라는 식으로 책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우연히 주는 것이다. 김씨는 “그렇게 ‘읽기’의 경험이 시작된다”며 “그게 세렌북피티가 일반적인 서점하고 다른 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일까. 세렌북피티는 일반적인 서점처럼 책을 분야별로 부류해놓은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나 고민, 트렌드에 방점을 맞추고 있다.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테마를 설정하고, 그와 관련된 서적이 진열되는 방식이다. 테마는 ‘나 오늘 좀 센치해’, ‘부장님, 너나 잘하세요’, ‘안아프고 싶은 청춘이다’, ‘인간은 누구나 철학자’, ‘연애를 글로 배웠습니다’, ‘냥이를 사랑하시나요?’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했으며, 그 안에는 소설, 시집, 인문서, 실용서, 에세이, 그림책, 매거진, 잡지 등 다양한 종류의 책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씨는 “대형서점이 아닌 이상 작은 서점은 에세이면 에세이, 여행서적이면 여행서적, 요리책이면 요리책, 전문적인 서적 하나를 정해 그것만 다루는 서점이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게 정답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나의 주제로 묶어서 다양한 분야의 책을 선보이게 됐다”고 말했다.

서점 중앙에 위치한 메인서가에는 ‘당신의 봄은 어느 쪽이세요’ 라는 코너를 만들어 한쪽에는 싱글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의 책들, 다른 한쪽에는 연인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의 책들이 배치돼 있기도 했다. 책은 김씨가 일일이 고른 후 김씨가 생각한 주제대로 분류한 것이다. 보통 2~3주 사이에 주제를 바꿔가며, 고객층에 맞춰 콘텐츠를 보안해나간다는 계획이다.

세렌북피티에 구비된 책은 1000여권에 달하지만, 빈 공간 없이 책이 들어차 있지는 않다. 오히려 책 진열 방식이 여유로운 느낌을 준다. 김씨는 세렌북피티가 서점이지만 책을 많이 들여놓을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김씨는 “우리 서점에는 특정 책을 꼭 사려고 오는 사람은 없다. 우연히 들어와서 생각지도 못한 책을 만나게 되는 곳이 세렌북피티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이 들어왔을 때 책 소개도 안 한다. 사람들이 편안하게 책을 접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부담을 주면 구매를 하지 않을 뿐더러 사람들이 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라며 “나는 사람들이 세렌북피티에 와서 책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게 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다. 반드시 왔을 때 책을 사야한다는 강박을 주면 쉽게 들릴 수 있는 곳이 아니게 된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어 “세렌북피티에서 책을 안사도 괜찮다. 사람들이 와서 차를 한 잔 마시고 가고, 사진을 한 장 찍고 가도 상관없다. 굳이 책을 사지 않더라도 여기서 우연히 관심 있는 분야의 책을 들춰보게 되고, 아 저런 책도 있구나 하는 생각만 하게 되더라도 책에 대한 관심을 얻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실제 세렌북피티에서는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는 사이 책을 들춰보거나, 화장실에 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책에 눈길을 주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혹은 메인서가에 적힌 주제에 흥미를 느껴 관련된 책을 살펴보는 사람도 있었다. 짧은 순간, 책을 접하는 기회를 갖게 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이러한 방식으로 책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킬 것이라는 김씨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가 끄덕여졌다.

서점 이름이 세렌북피티가 된 것도 서점이 가진 정체성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세렌북피티는 뜻밖의 발견, 우연한 행운이라는 뜻을 가진 ‘세렌디피티(serendipity)’에서 가지고 온 이름이다. 그냥 맥주 한 잔 마시러, 커피 한 잔 마시러, SNS에 올릴 사진을 찍으러 이곳에 왔는데 우연히 집어든 책 한권에서 당신의 세렌디피티를 만날 수 있게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러한 세렌북피티의 모토는 서점 한켠에 적혀있는 ‘인생서점’이라는 문구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 “준비된 사람에게 행운이 찾아오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이곳에서 그런 행운을 얻어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김씨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세렌북피티 같은 동네서점을 구상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김씨에게 그 배경에 대해 물었다. 이에 김씨는 “전 직장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근무 당시 출판 업계를 보면서 ‘치킨게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모바일 시대가 되면서 책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게 되고 출판계 시장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이라며 “출판업계에 사명감을 가지고 좋은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책이 팔리지 않아 다들 어려운 형편이다. 그들을 보면서 좋은 책을 내는 출판사는 많이 있으니 나는 그 좋은 책들을 사람들에게, 특히 일 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연스럽게 권유해 보면 어떨까 생각했다. 또 그런 형식이 출판업계 시장을 키울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하면서 세렌북피티는 출발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이 작은 공간이 출판시장에 엄청난 영향을 불러일으키진 않겠지만 나 나름대로 시도를 해보는 것”이라며 “책이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는 작업들이 사방 곳곳에서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한다. 일상 만연한 곳에 책이 배치돼 꾸준히 책이 노출되면 판매로도 이어지고 그게 출판시장을 유지할 수 있게 하지 않을까. 나의 작은 시도가 나비효과가 되어, 출판계에 뜻밖의 행운, 세렌디피티를 불러오면 좋겠다”라고 강조했다. 세렌북피티을 만든 스스로를 ‘낭만 현실주의자’로 칭하는 그녀에게서 책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세렌북피티는 SNS와 유튜브 등을 이용한 다양한 홍보 활동을 준비 중이다. 독자와 출판사 중간에서 좀 더 세련되고 거부감이 들지 않게 책을 권하는 방식을 시도한다는 계획이다. 따분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여기지만 책이 지니고 있는 가치만큼은 높이 사는 사람들, 특별히 책을 찾아 읽지는 않지만 다른 문화감성은 충만한 사람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어떤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당장 오는 4월부터는 ‘책맥 방송’이 시작된다. 세렌북피티의 대표인 김씨가 직접 영상을 찍어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맥주에게 어울리는 이 책’과 같은 식으로 책을 소개할 방침이다.

김씨는 “세렌북피티를 통해 물론 돈도 벌고 싶지만 서점이라고 하면 사양사업이라고 생각하는 인식 자체를 바꾸고 싶은 마음이 크다”며 “서점이 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공간이냐. 다양하고 매력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게 책이라는 매개체다. 이렇게 세련되게도 서점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의지를 보였다.

이어 “사람들이 책이라는 것에도 작은 사치를 부려줬으면 좋겠다. 오늘 하루를 잘 살아낸 나에게 주는 선물, 그 작은 사치는 과소비라고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생서점 세렌북피티에서 내 인생의 세렌디피티를 만났네, 하는 경험들이 쌓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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