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적 생태론과 환경론에 대한 거부

김재홍 시인.

한 나무에서 난 잎은 어느 것을 보나 같은 모양 같은 색조를 띤다. 이 계절의 나뭇잎은 연초록 여린 매무새로 그 맵시는 한 편의 따뜻한 동화를 연상시킨다. 한 몸에 났으니 생존을 위해서도 식생을 위해서도 나뭇잎의 통일성은 자연스런 양상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김생김 또한 저마다 다르다. 크기도 모양도 위치도 색상도 느낌도 모두 다르다. 다르기 때문에 한 나무의 식생에 잎들은 저마다 특별한 기여를 하고 있다. 이파리 몇 장이 기능을 상실하더라도 잎 전체가 한꺼번에 멸실되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r-전략을 구사하면서 나뭇잎은 호흡과 광합성을 통해 나무의 생명 유지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꽃도 마찬가지다. 한 꽃을 보더라도 꽃잎은 서로 모양과 색이 미세하게 다르다. 햇볕 차이, 기온 차이, 바람 차이, 뿌리로부터의 거리 차이 등 온갖 ‘차이’가 원인이 되었을 꽃잎의 차이는 화초의 생식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한 몸에서 난 것들이지만 나뭇잎도 꽃잎도 모두 같은 듯 다르고 또 다른 듯 같다. 자연은 다른 듯 같고 또 같은 듯 달라서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도 같은 듯 다르고 또한 다른 듯 같다. 그것이 인류의 생존을 보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래서 살아남았기 때문에 그렇다. 사람을 포함한 자연계는 규칙성과 불규칙성, 확실성과 불확실성, 질서와 무실서,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모순적 상황이 공존하는 터전이다. 그것이 자연의 본성이다.

브라운 운동(Brownian motion)은 액체 혹은 기체 안에서 움직이는 작은 입자의 불규칙한 운동을 말한다. 꽃가루의 운동이나 냄새의 확산 현상 등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에 이는 무한 변주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영육 분리나 본질적 차이를 주창하는 많은 성현의 뜻과 상관없이 내 한 몸에서조차 부지불식간에 벌어지는 ‘나의 분리’ 혹은 ‘나의 혼란’은 “내가 바로 자연이다.”를 외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철로는 가지런히 뻗어 있다. 철로는 끝없는 평행의 구조 위에 일종의 규칙성을 느끼게 하고 직선 또는 완곡선의 유려한 전개 위에 정서적 안정감도 품고 있다. 그런데 서울역이나 부산역처럼 선로 변경을 위한 갖가지 간선들이 놓인 큰 역을 조감할 때면 상당히 복잡한 불규칙적 외관을 드러낸다. 과학적 근대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철로에도 본선과 지선, 규칙적 외관과 불규칙적 이미지가 혼재하고, 그것의 체계적인 운용이 국민의 안전한 열차 이용을 가능케 하고 국가경제의 동맥으로서 제 기능을 하게 한다.

사람 안에 무수한 사람이 있고, 물질 운동에도 규칙성과 불규칙성이 공존하고, 나뭇잎과 꽃잎에도 동일성과 차별성이 상존하는 게 자연이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룩하지 않으면 파멸을 맞는다는 점이다. ‘나의 혼란’이 정도를 지나치면 회복키 힘든 중병이 되고, 입자 운동이 균형을 상실하면 물질이 파괴되며, 다양성을 잃어버리면 식물도 살아남을 수 없다. 조화의 임계 치를 지켜냈기 때문에 자연은 끊임없이 ‘스스로 그러할’ 수 있었다.

인간 존재의 위의를 높여 온 역사인 문명화는 분명 사람살이의 행복 조건을 확장시켜 왔다. 일부 반문명론자의 왜곡과 퇴행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문명의 이기는 여전히 현대인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반문명론이 반인간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것도 거부할 수 없는 문명을 비현실적으로 외면하기 때문이듯 조작된 허위의 부정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는 생동하는 문명화는 더욱 가속돼야 한다. 자연의 상대어는 문명이 아니라 반자연이다.

산업화를 반자연, 반인간으로 몰아붙이는 극단적인 생태론과 환경론이야말로 반자연, 반인간이다. 한국인에게 산업화는 삶의 조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일대 역사이다. 논밭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물이 있어야 고기를 잡는 농어민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국민이 산업도시나 그 배후도시에 살고 있다. 산개한 촌락 공동체의 삶은 불과 반세기도 안 돼 도시민의 생활로 전환되었다. 식민지 경험과 전쟁과 가난을 겪은 우리에게 산업화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소당연(所當然)에 가깝다. 그것은 구미의 산업화가 여러 가지 부당한 양태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으로 자연스러운 전개인 이치와 같다.

2015년 현재 농어민은 전체 인구의 약 5%에 불과한 270만 명이다. 반면 서울을 포함한 7대 광역시에 사는 인구는 2천3백만 명으로 국민의 50%를 가볍게 넘어선다. 이밖에도 각 도별로 조성된 산업도시 거주민까지 포함하면 거의 전 국민이 도시인의 정체성으로 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현실은 우리가 왜 도시인의 삶을 벗어날 수 없으며, 왜 도시적 문명을 소중히 가꾸고 다듬고 긍정해야 하는지 깨닫게 한다.

이는 또한 생태론자나 환경론자들의 균형을 상실한 이념적 절대주의가 왜 현대 도시인의 삶에 스며들지 못 하고 거부되는지, 왜 그들의 순정성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소리 없는 아우성’에 그치고 마는지 스스로 성찰하게 만드는 현실이기도 하다. ‘일체의 문명적 요소를 떨쳐 버리고 원시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한 환경 절대론자의 공허한 외침이야 무시한다손 치더라도 KTX 터널 공사와 해군기지 건설과 송전탑 이설을 가로막은 행동가들의 가치가 국민의 보편적 지지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은 확실히 인정해야 한다.

황종과 협종은 한 몸이다. 협화음과 불협화음도 한 몸이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현상도 자연 속에 늘 한 몸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자연에 모순이란 없다. 문명도 자연과 분리된 별개의 차원이 아니다. 인간 행복을 증진시키려는 인류의 장구한 노력의 결실이 문명인 한 그것은 자연과 한 몸이다. 조화 파괴와 균형 상실의 주범은 오히려 목적을 다른 데 두고도 버젓이 환경과 생태를 운위하는 이념적 맹종주의자들일 뿐이다.

극단주의나 절대주의 이념에 갇혀 의도적으로 갈등을 조장하는 것도 반대하지만, 갈등 자체를 부정하는 것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생존 조건의 차이와 견해차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그 갈등을 풀고 좁히며 공동체의 터전을 굳건하게 지켜낸 우리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만 있어도 안 되고 한 사람이 되라고 해서도 안 된다. 무차별적 ‘우리’도 인정할 수 없지만 한 사람을 고집하는 것도 반자연적 태도다. 그러므로 자연은 공멸을 회피할 조화의 슬기와 대긍정의 가치를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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