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어주는 일은 제게 크나큰 축복이죠”

[월요신문 권현경 기자] 서울 마포평생학습관 시각장애인실 자원봉사 회장 최원숙 씨. 그의 직업은 책 읽어주는 여자다. 앞을 못 보는 시각장애인에게 고운 목소리로 책 내용을 들려준다.

최 씨는 이곳 시각장애인들에게 등불 같은 존재다. 1996년부터 시작한 녹음 봉사는 올해로 22년째를 맞고 있다. 그동안 최 씨의 도움을 받아 지식의 소양을 쌓고 대학에 진학한 시각장애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최 씨는 올해 67세로 손주를 돌볼 나이다. 하지만 처음 자원봉사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마음은 한결같다. 지금도 일주일에 4일은 봉사하느라 바쁘다.

13일 오후 5시, 최 씨를 만나기 위해 마포평생학습관 1층 시각장애인실을 찾았다. 마침 그는 헤드셋을 한 채 녹음 중이었다. 잠시 기다렸다가 녹음을 마친 그를 만났다.

도서 녹음 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

고등학교, 대학교 때 방송반 아나운서를 지냈다. 마포도서관 개관하면서 운영위원으로 있다가 시각장애인실을 만들고 홍보물 내레이션을 맡았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녹음도서 제작을 시작하게 됐다. 사실 시작할 때는 이렇게 길게 할 수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녹음도서 제작은 어떻게 하는 건가.

초창기에는 라디오녹음기로 녹음했다. 카세트테이프를 녹음기에 넣고 녹음을 누르고 책을 읽는 방식이다. 읽다가 잘못 읽으면 다시 틀린 부분을 덮어서 녹음하는 손쉬운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컴퓨터 음성파일로 저장해 CD로 제작한다. 컴퓨터에 녹음 시작을 클릭하고 읽으면 저장이 된다. 녹음된 내용을 확인하면서 동시에 모니터로 소리 음역대를 눈으로 볼 수 있다. 잘못 읽은 부분은 마우스로 그 부분만 지정해서 잘라내고, 다시 읽은 부분을 붙여 편집할 수 있다. 가끔 컴퓨터를 잘못 만져서 애써 녹음한 것을 다 날려 자책할 때도 있다. 옛날 방식이 좋았던 것 같다.

녹음할 때 어떤 부분을 가장 신경 써야 하나.

책을 녹음할 때는 책 제목, 저자명, 페이지, 괄호 종류까지 다 읽어준다. 예를 들면 꺽쇠 괄호 열고 내용 읽고 꺽쇠 괄호 닫고 이렇게 읽는다. 알파벳도 큰 에이, 작은 에이, 그림이 나오면 그림을 설명해줘야 한다. 영어는 읽을 수 있지만 간혹 불어, 독어 발음은 어려워서 휴대폰으로 발음 듣고 따라 연습해서 녹음한다. 가능한 생생하게 눈으로 보는 것처럼 책을 읽고 녹음해야한다. 특히 시각장애인들이 들을 때 재생속도를 빨리 해서 듣기 때문에 발음의 정확성에도 각별히 신경을 쓴다.

주로 어떤 종류의 책을 녹음하나.

시각장애인실에는 이용자 주문을 받아 맞춤형 희망도서를 제작한다. 교양도서, 수험서, 침술서적, 성경, 개인학습자료 등 신청목록에 따라 다양하게 녹음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시각장애인들에게 좀 더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에 시와 수필 쪽을 선호해왔다. 그림 설명이 어려워 가능하면 그림 없는 책을 고르려고 미리 살펴본다.

22년째 낭독 봉사를 계속해오고 있다. 쉽지 않았을 텐데.

17년 전의 일이다. 시각장애인실에 견학을 왔던 맹아학교 한 학생이 있었다. 군 제대하고 대학 복학 후 뇌종양 수술을 받으면서 시력을 잃은 젊은이였다. 집안 형평상 매달 60-70만원 하는 안마사 학원을 다닐 수 없어 안마사 자격증이 나오는 맹아학교를 뒤늦게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 학생의 간곡한 부탁에 대면낭독으로 국어 공부를 봐주기 시작했다. 결혼하기 전에 국어교사로 7년 반 동안 재직했던 경험이 있어 일종의 재능기부 차원이었다. 방학 때만 봐주면 될 줄 알고 시작했는데 방학이 끝나도 계속해달라고 하는데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국어 지문을 모조리 읽어주다 보면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리고 목소리가 쉬었다. 밤 10시까지 지문을 읽어주노라면 내 자식은 팽개쳐 두고 이게 뭐하는 건가하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집에 갈 때 초점이 안 맞는 눈으로 연신 ‘선생님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는 그를 보면 가슴이 뭉클하면서 내가 도울 수 있을 때까지 도와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학생이 대학에 들어가고 학년이 올라가고 성장하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특별히 기억에 남거나 보람을 느꼈던 일은.

앞서 얘기한 학생이 동국대 사회복지과에 합격했을 때, 그리고 사회복지사 1,2급 자격증을 땄을 때 정말 보람을 느꼈다. 내 자식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기뻤다. 대학 재학 내내 매 시험 때마다 시험문제지 읽어주고 녹음해줬다. 자격증 시험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 9호선 지하철공사 직원으로 양호실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 달만 가르치려고 했는데 이렇게 인연이 길어졌다. 한번은 그가 스승의날에 연락을 해 찜질방에서 안마를 해 주겠다는데 극구 말렸다 (웃음).

책을 많이 읽어주려면 건강관리도 중요할 것 같다.

책을 읽는데 목을 많이 쓰기 때문에 목이 따끔거리고 아플 때가 종종 있다. 항상 물을 많이 마시고 밤에는 목에 수건을 감고 자면서 감기에 안 걸리게 한다. 아파서 녹음을 못하게 되면 제일 속상하다.

낭독 봉사를 하려는 사람에게 조언을 한다면.

책 녹음 봉사는 많은 봉사자들이 왔다가 대부분 중간에 그만 둔다. 일부 학생들은 봉사점수 받으러 오고 아나운서 지망생 등 방송 분야로 취업하려는 학생은 취업되면 나가버린다. 봉사할 때 가능하면 장기간 하는 게 중요하다. 적어도 책 한권은 녹음할 것, 녹음하던 책은 반드시 반납하고 갈 것을 얘기해 주고 싶다.

시각장애인 봉사자 입장에서 일반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점은.

지하철역이나 도로에서 장애인 보도블럭을 쉽게 볼 수 있다. 노란색으로 된 보도블럭은 점자책처럼 올록볼록 튀어나와 있다.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은 그걸 보고 걷고 지팡이로 두드리고 걸으면서 길을 확인한다. 시각장애인들이 보도블럭을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길을 비켜주고 비워두는 배려가 필요하다. 또 그들은 보는 것만 불편할 뿐 다른 감각은 매우 발달해 있다. 특히 귀는 10배 더 발달돼 있는 편이다. 못 듣겠지 생각하고 상처 받을 수 있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면 좋겠다.

앞으로 얼마나 더 봉사활동을 할 계획인가.

현재 마포시립노인복지관에서 화/목/금(한글 초,중,고급 3강좌), 창전 실버문화센터(화/생각대로 글쓰기 수필반)을 어르신들을 위해 강의하고 있다. 선생님 중에 한 분이 80세까지 가르치는 걸 봤다. 나도 그 때까지는 할 생각이다. 매주 목요일마다 하는 녹음봉사는 임플란트 하게 되면 발음에 지장이 생길 것 같아 걱정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는 계속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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