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노동자의 어머니’ ‘컨테이너 박스의 천사’ 김 할머니의 감동 사연

김미수 선교사. <사진=월요신문>

[월요신문 김혜선 기자] 경기도 파주시에 위치한 한 교회 옆에는 2평 남짓한 컨테이너 박스 3개가 모여 있다. 가장 위층에 있는 컨테이너 하나가 외국인 노동자들이 옹기종기 모이는 ‘외국인 교회’다. 이 교회에서 외국인노동자를 15년째 돌보는 이가 있다. 올해 62세의 김미수 선교사다.

김씨는 이곳에서 ‘아워 마더(Our mother)’로 통한다. 아프리카계 특유의 발음으로는 ‘아와 마다’다. 작은 체구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가진 김씨는 “요새는 아들과 며느리 부부가 있어서 자주 집에 못 오지만, 전에는 내 집 드나들 듯 외국인 분들이 오셨다. 같이 이야기하고 식사하고 함께 지내며 참 많이 친해졌다. 밥을 해 줘서 엄마라고 부르는 것 같다”고 수줍게 웃었다.

그가 외국인 노동자를 돕기 시작한 것은 2002년부터다. 당시 교회에서 외국인 노동자 3명을 돌보던 분이 영국으로 발령이 나자, 교회 안에서 유일하게 영어를 할 줄 알던 김씨에게 이들을 맡겼다. 김씨는 외국인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아무래도 ‘외국인’ 신분이다 보니 현지인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많았고, 그때마다 김씨는 사비를 털어 이들을 도왔다.

김씨는 인터뷰 내내 “이런 걸 이야기 하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말했다. 가장 놀라웠던 것은 재취업 이야기였다. 김씨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금전적으로 돕기 위해 재취업에 도전했고 성공했는데 당시 나이가 59세였다. 회사는 독일계 제약회사였다.

세상에 59세에 외국계 회사에 재취업했다니, 경단녀로는 최고 기록이 아닐까. 비결이 뭔지 물어봤다. ‘미생물학’이라고 답했다. 출신 학교를 묻자 “나는 선교사니까, 신학을 배우고 그리스도 대학원을 나왔다”고 답했다. 그래도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미생물학을 어디서 전공했는지 다시 물어봤다. 이에 김씨는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공부는 조금 했다”며 끝까지 밝히지 않았다. 어쨌거나 예사롭지 않은 분이라고 느꼈다. 내가 아닌 타인을 돕기 위해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재취업을 결단한 속사정은 뭘까. 본격적인 질문을 꺼냈다.

 

이곳에서 주로 하시는 일이 뭔지요

이민국 문제와 직장에서의 문제 아플 때 병원에서 처리해야 하는 문제 등 생활에 필요한 전반적인 문제들을 다 도와주고 있어요. 한국사회에 적응하면서 생기는 문제들도 있고요. 일주일에 한 번 이분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요. 컴퓨터 교실을 열기도 했는데 지금은 센터가 없어져서 안 해요. 범계 쪽에 외국인 센터가 있었는데, 홍수가 나서 센터를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어요. 그래서 파주로 들어왔어요. 파주에는 외국인 쉼터도 있고요.

 

외국인 쉼터는 어떤 곳입니까

작은 아파트인데, 갈 곳 없는 외국인들이 무료로 잠시 머무를 수 있는 쉼터예요. 지금은 두 명인가 있어요. 그 집 관리는 다니엘이라고, 다른 외국인 목사님에게 맡겼어요.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인데 자꾸 참견하고 그러면 좀 그렇잖아요.

 

쉼터가 아파트라면 비용이 꽤 들었을 텐데 어떻게 구했습니까.

내가 구했죠. 매입한 건 아니고 전세예요. 외국인 노동자 돕는 일이 그래요. 하나부터 열까지 쉬운 일이 없어요.

 

다니엘 목사도 외국인 노동자였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목사님이 된 거죠.

처음엔 그랬죠. 그런데 옆에서 보니까 똑똑하고 착해요. 공부를 하면 좋을 것 같아서 2년 동안 신학 공부하라고 설득했어요. 그래서 신학 대학교에 들어가서 4년 동안 공부했죠.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학비 조달이 어려웠을 텐데 혹시 학비도 대주신 건가요.

네. 저는 다니엘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목사 일을 하길 바랐는데, 대학원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다니엘이 중간에 너무 힘들어 해 대학원 학비를 딱 한번 도와주고 나머지는 스스로 일 하면서 학비를 해결했어요. 지금은 박사 학위를 따려고 한다네요. 교수가 되고 싶대요.

 

여기엔 아프리카계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데 주로 그곳 출산만 도와주시는 건가요.

아니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이 주로 많지만 필리핀에서 온 이도 있어요. 그런데 홍수로 센터가 사라져서 필리핀 모임은 서울 연동교회로 나갔고, 아프리카는 각자 지역 교회로 흩어졌어요. 제가 있는 곳은 파주 지역이고요.

 

교회에 외국인노동자 모임이 언제부터 생겼습니까

제가 오기 전부터 있었어요. 교회 장로님이 모임을 맡았는데 그분 직장이 영국으로 발령이 나서 제가 1년간 맡기로 했죠. 그렇게 시작한 게 15년째예요. 시간이 지나면서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수백 명이 됐습니다. 지금은 동두천, 안산, 광주, 평택 등 지역으로 흩어졌어요.

 

이민국 문제는 어떻게 도와주세요.

이민국에서 불법 체류자를 잡잖아요. 구속되면 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도와줄 일이 많아요. 본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삯을 마련해야 하는데다, 다니던 회사에서 그동안 일했던 임금을 받아 줘야 하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일하는 데가 돈을 빨리 줄 수 있는 데가 아니어서 해결하기가 쉽지 않아요.

 

불법체류자를 돕는 일이 법에 저촉되는 경우는 없습니까.

불법체류는 제 소관이 아니에요. 하지만 실제 생활로 들어오면 ‘불법이니까 가!’라고 할 수 없어요. 왜냐면, 이 사람들 형편이 뻔하잖아요. 있는 돈 없는 돈 끌어 모아서, 빚내고 한국에 왔는데 가라고 하면 이 사람들 입장에선 억장이 무너지죠. 한 사람에게 온 식구의 생계가 달려있으니까요.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대처해요. 불법이다 아니다를 떠나서, 한 인간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걸 해주는 거죠. 옳고 그른 걸 따지지 않고 문제가 있을 때 그 사람한테 필요한 걸 도와줘요. 예전에는 내가 직장 같은 것도 알아봐주고 그랬어요. 하다 보니까 한계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요즘은 불법체류 상담이 들어오면 긍정적인 쪽으로 상담을 해주고,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도와주고 있어요.

 

불법 체류자를 상담한 사례 하나 들려주세요.

가나에서 온 청년이 있었어요. 관광 비자로 한국에 들어왔다가, 학생 비자로 바꾸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그래서 붙잡혀갔는데, 내가 딱 보면 알지요. 비자가 안 나올 것 같으니까 그냥 가라고 조언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가기 싫으니까 변호사를 고용해서 한국에 남으려고 했어요. 근데 이민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청년이 너무 흥분하니까 안정제를 놨나봐요. 자기 허락도 없이 안정제를 놓고 본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하고 그런다고 아주 화를 많이 냈어요. 이민국 법상, 문제가 생기면 해결할 때까지 절차가 있거든요. 나중에는 변호사도 손을 떼고 그 친구는 본국으로 송환됐어요.

 

외국인 노동자 임금 체불 문제가 심각한데 여기도 그런가요.

거의 임금 못 받는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임금 체불은 예전에는 사장님들 쫒아다니면서 받았는데, 요즘은 우리나라도 노동법이 강화돼서 불법체류자도 월급 못 받으면 받을 수 있게 도와줘요. 우리가 몇 번 찾아가는 것보다 고용센터에서 전화 한번 해주는 게 더 빠릅니다. 예전에는 정말 받기 힘들었어요. 위협도 받고요. 외국인 노동자를 고용하는 회사들은 대부분 소규모예요. 워낙 소규모이다보니까 임금에 이득이 좌우되는 게 커요. 업종상 사장님들 입도 굉장히 거칠어요. 심하게 욕하고 말도 못 해요. 입으로 담을 수 없이 많이 당했지요. 그런데 불법체류자들은 노동청에 가서 이야기하기를 굉장히 꺼려해요. 불법체류자 신분하고 임금 체불과는 상관이 없는데, 그렇게 생각을 안해요. 그래서 못 받고 마는 경우가 많아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도 많은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에서는 피부가 검은 사람들에 대해선 차별이 강해요. 멸시하고 노예 다루듯이 소리를 지르고 욕하고 그래요. 수년 전 일인데 나이지리아 노동자가 일하다가 손가락이 잘렸어요. 빨리 병원에 데려가서 봉합수술을 해야 하는데 회사 사람들이 문제 생길까봐 붕대로 감아 놓고 병원에 안 데려간 거예요. 네 시간 동안이나. 그래서 다친 분이 나한테 전화를 했어요. 내가 가서 응급차 불러 신촌에 봉합수술 잘 하는 병원에 입원시켰어요. 한국 사람들이 다쳤다면 그렇게는 안 하죠. 그 일은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그러고 나서 사장이 하는 말이,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거예요. 보상받느라고 쫒아다니고 그랬는데 2~300만원인가 받고 다친 사람은 결국 본국으로 갔어요. 봉합도 잘 안 됐어요. 너무 병원에 늦게 가서.

어떤 회사 사장은 비오는 날 회사가 쉬면 집으로 불러서 본인과 마누라까지 마사지를 시켜요. 그런 사람들 많이 봤는데 완전히 차별이죠.

 

혼자서 발로 뛰며 하기에는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뭔가요.

인력이요.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해요. 외국인 노동자들을 도와주려면 이 사람들의 손, 발, 입이 돼야 해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얼마나 바쁘겠어요. 한 사건이 일어나면 일회성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잖아요. 누군가를 도울 때는 보통 봉사차원으로 하는데, 외국인 노동자를 돕는 일은 풀타임으로 해야 해요. 사비도 많이 들고 해서 이쪽으로는 봉사 인원이 많이 부족합니다.

 

후원은 받고 있습니까. 경제적으로 힘들텐데 어떻게 해결하세요.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게 참 어색하네. 이런 이야기 별로 하기 싫어요. 신문에 내고 싶지도 않고. 그냥 내가 가진 것 갖다가 썼어요. 계속하다보니 한계가 와서 취업을 한 거죠.

 

참 대단한 의지이신 것 같습니다. 언제가 가장 힘드셨어요.

병원비 부족할 때가 제일 힘들어요. 불법 체류자들은 병원 가는 게 쉽지 않잖아요. 가장 힘들었던 때는, 한 분이 집에서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적이 있어요. 일단 사람이 죽었으니까 병원으로 옮겼는데, 장례를 치를 돈이 없는 거예요. 차가운 냉동실에서 계속 그 분을 놔두고...병원에서는 빨리 돈을 달라고 재촉하고. 결국 어찌어찌 해서 한 단체가 본국으로 시신을 보내는 비용을 대 주기로 하고 시신을 보냈는데, 갑자기 지원이 취소됐어요. 그 비용을 제가 갚았습니다. 그때 정말 힘들었어요.

 

혹시 가족 분들이 반대하지는 않습니까. 재산을 다 탕진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말이죠.

내가 아니라 신이 하셨죠. 15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나의 의지대로만 되었겠어요.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도와주시는 분도 생기고 그래요. 남편은 내 일에 이래라 저래라 한 마디도 안 했어요. 오히려 많이 도와줬죠. 예전에 범계 센터에 있을 때 여러 지역에서 외국인 분들이 모였는데 이 분들을 태우고 다니려고 남편이 대형버스 운전면허를 땄어요. 버스도 하나 사고요. 계속 픽업하러 다녔죠. 요즘엔 좀 덜 도와주네요. 하하하.

 

김미수 선교사는 내달 초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다. 미국에서 꼭 하고싶은 공부가 있단다. 환갑이 넘은 나이에 참 대단한 의지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까 생각을 많이 했다. 가능하면 돈을 많이 벌고 싶다. 그래서 생각한 일이 있는데, 가족들만 알고 있다”

가족만 알고 있다는 그 생각이 ‘착한’ 일일 거라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믿음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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