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규 편집인

박정희의 딸은 2명이 아니고 3명이다. 박근혜, 박근령 외에 한 명의 딸이 더 있다. 그 딸은 박정희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 혼외 자식이다. 그 딸을 낳은 여인은 촉망받는 배우였다. 1990년 필자는 박정희의 내연녀 소문을 추적하는 중 그 여인을 만났다. 오래 설득한 끝에 여인은 박정희와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여인의 증언은 충격적이었다.  

여인이 박정희를 처음 만난 것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혁명위원회 주최로 열린 만찬장에서였다. 당시 여인은 영화계에 갓 데뷔한 신인 배우였다. 뛰어난 미모 탓에 충무로 감독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던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혁명위원회 만찬에 불려나온 것은 채홍사 때문이다. 박정희 측근의 한 채홍사는 충무로에서 가장 예쁜 배우를 물색하다가 그 여인을 찍었다. 그렇게 박정희와 여인의 인연은 시작됐다.

“그때 박 대통령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 인생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김지미씨처럼 유명한 배우가 됐을 수 있고 아니면 한 남자의 아내로 평탄한 삶을 살 수도 있었겠지요”

여인은 회한에 찬 목소리로 증언했다. 그러나 인간 박정희를 원망하지는 않았다.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지방 순시 갈 때 꼭 불렀어요. 온양온천을 좋아하셨는데 같이 묵을 때 하신 말씀도 기억에 남습니다. TV에 뉴스를 보며 ‘임자 저건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기도 하셨지요.“

둘 사이의 메신저는 박종규 경호실장이 맡았다. 안가도 마련해줬다. 장소는 한남동 유엔빌리지 내 외딴 주택. 생활비는 매달 박실장이 직접 전달했다. 박 대통령이 불시에 들를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전에 박 실장이 메시지를 전했다. 그렇게 18년을 부부 아닌 부부로 함께 살던 둘의 인연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거사로 끝이 났다.

“1979년 10월 26일 그날 일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촛불을 켜고 불공을 드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촛불이 탁 꺼졌어요. 불길한 예감이 들더군요. 그 다음날 사망 소식을 듣고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뒤 여인은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환속했다. 여인은 환속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절에서 아이 교육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비록 혼외 자식이지만 그분이 남긴 혈육을 잘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절에서 나와 닥치는대로 일을 했습니다. 어린 딸애가 아버지 이름이 뭐냐고, 어디 있느냐고 물어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습니다. 하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었어요”

취재를 끝내고 데스크에 보고했다. 데스크는 증거를 요구했다. “ 한쪽은 고인이다. 일방적인 주장이라고 하면 어쩔 거냐. 박정희와 함께 있는 사진이나 친필 편지 구해와” 등등. 다행히 여인은 박정희와 같이 찍은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기사 반향은 컸다. 사방에서 전화가 빗발쳤다. 누군가 박근혜 당시 육영재단 이사장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할지 모른다고 겁을 줬다. 그런데 박 이사장 쪽은 조용했다. 그때 만난 중앙정보부 한 간부가 “그 기사는 팩트다. 우리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박 대통령 유족들이 조용한 것은 후폭풍을 우려한 때문일 거다. 박대통령 혼외자식이 친자 확인소송을 하겠다고 나서면 어쩔 거냐. 그렇게 되면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 무렵 육영재단 비리도 취재했다. 육영재단 직원들이 대거 쫓겨나고 최태민 일가의 전횡이 문제시되는데도 박근혜 이사장은 오불관언(나는 상관하지 아니함)이었다.

박근혜는 왜 최태민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질까. 취재를 할수록 그런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중정 간부는 그 의문에 대해 ‘혼이 얽매인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최태민을 조사했다는 중정 간부의 설명은 이렇다.

“최태민은 육영수 여사의 혼령을 끌어내 박근혜와 대화를 나누게 했다. 당시 우울증을 앓던 박근혜에게 ‘어머니와의 대화’는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박근혜는 어머니와의 대화로 상처를 치유받았으며 그 계기를 제공한 최태민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했다.”

당시 중정 간부의 설명은 SF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얘기로 들렸다. 최태민이 아무리 신통력을 가졌어도 죽은 이의 혼령을 불러내 대화를 나눈다는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얘긴가? 그래서 미국에서 최면학을 전공한 정신과 의사를 만나 확인해봤다. 의사는 “(환자의) 심리 상태에 따라 다르다. 의식이 명료한 상태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기는 어렵지만 최면이 걸린 상태에서는 가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박근혜 주변이 달라진 것은 없다. 대상만 최태민에서 최순실로 바뀌었을 뿐이다. 바뀐 건 하나 더 있다. 환상이 허상임을 깨달은 것이다. 

100만, 200만…촛불이 점점 늘고 있다. 촛불은 외친다.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박대통령의 공도 존재한다. 그 공은 최순실게이트의 공범으로 우리사회에 던진 메시지다. 박근혜식 공포정치와 권력 남용이 두 번 다시 반복되어서는 안되는다는 자각, 수많은 시민들에게 그것을 성찰하게 한 공로다. 

선거와 언론의 중요성도 일깨워줬다. 촛불을 든 한 시민은 “최순실게이트를 보면서 선거를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 아마 최순실테블릿 PC 보도가 없었다면 그대로 묻혔을 것 아닌가. 지금 우리나라에는 권력의 감시자 역할을 제대로 하는 언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 대목에서 희망을 보았다. 온 우주가 나서도 해결하지 못할 것 같았던, 한국사회의 묵은 체증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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