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박지원과 완당 김정희의 현대성

김재홍 시인.

연암 박지원(1737-1805)은 성리학적 전통 위에 청(淸)과 서양 문물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중상적 경세론을 펼친 북학파의 태두다. 완당 김정희(1786-1856) 역시 굳건한 성리학적 토대에 불교와 금석학을 아우르며 청나라 학계로부터 해동제일통유(海東第一通儒)로 불린 대학자다. 이들 두 대가는 50여 년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예술적 성취까지 포함하여 조선 후기 학예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호질> <양반전> 등 뛰어난 한문소설은 물론이고 연암 문학의 백미로 꼽을 <열하일기>는 품에 안은 문제의식과 표현력에서 가히 200년 묵은 현대 문학이라 부를 만하다. 박지원은 1780년 종형이자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 박명원을 따라 청나라 건륭제(고종)의 칠순 연에 참석하는 사신의 일원으로 동행했다. <열하일기>는 요동•요하•북경•열하 등지를 지나며 보고 겪고 들은 이야기를 생기 있는 필치와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연암이 열하를 다녀 온 29년 뒤 완당도 아버지 김노경이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수행해 연경을 다녀왔다. 당시 청나라 학계는 금석학•사학•문자학•음운학•지리학 등이 독자적인 진전을 거듭하고 있었고, 특히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 연구와 더불어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김정희는 최고조에 이른 연경 학계와 교류하면서 옹방강•완원 같은 대학자의 큰 영향을 받았다.

완당은 경학은 물론 흥기하는 모든 분야의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신라 진흥왕의 북한산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금석학 연구에 몰두했다. 그의 예술관은 시•서•화 일치의 관점에서 고답적인 이념미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는 성리학을 토대로 발전해 온 조선 고유의 서화 풍을 비판하면서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로 표상되는 <세한도>와 <불이선란도> 등 수많은 걸작 서화를 남겼다.

연암 박지원의 법고창신은 고루한 의고주의가 아니라 창신에 대한 열망과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선각자적 대긍정의 웅변이었다. 또 ‘금강역사 같은 눈과 혹독한 세리의 손끝 같아야 한다(金剛眼酷吏手)’고 외치며 고졸미를 추구한 완당 김정희는 입고출신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었다. 연암과 완당은 경학과 실학을 통섭하며 유례없는 예술적 성취를 이룩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현대적이게 하는 것은 날카로운 글로벌 감각이다. 이들이 딛고 있던 땅은 왕조국가 조선이었으며, 이들의 정신적 배경은 성리학을 핵으로 한 유교 전통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창신’과 ‘출신’의 노력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청과 서양의 선진 문물을 섭렵하고 최신 학문을 독파했다. 당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힌 그들은 진정한 미래파였다.

또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이들의 독자성이다. 과거의 전통과 고전에서 자기 학예의 터전을 찾았지만 이들은 어느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고유한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시대의 통념을 넘어섰다. 평균주의를 철저하게 거부함으로써 이들은 현대적 거인이 될 수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 회자되는 고전주의 시대의 영웅은 자신만의 고유한 독자성을 끝까지 밀어붙인 사람들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바와 같이 ‘분배나 평가에서 노력의 질과 양을 고려하지 않고 다 같이 평균적으로 하려는 태도’를 평균주의라고 할 때 이는 비단 학예만 타락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어느 분야에서도 활기를 떨어뜨리고 목표의식을 굴절시키며 결국에 가서는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한다. 특히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에게 평균주의는 파국적 결말을 초래할 암적 존재에 가깝다.

평균주의는 생산과 창조보다는 이미 가진 것을 나누는 기준이다. 노력과 혁신보다는 중간치를 앞세우는 적당주의다. 평균주의는 본질상 보수적이며 기득권의 영역에 속한다. 재능의 차이를 부정하고 기호의 다양성과 창의적 도전을 가로막는 일종의 전체주의다. 그러므로 평균주의는 ‘없는 자’들의 배고픈 절규와 무관한 ‘가진 자’들의 나누기 방식, 즉 분배의 문제일 뿐이다.

분배할 게 없는 진짜 ‘없는 자’들에게 절박한 것은 생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이다. 자본금이 바닥날 지경에 몰린 벤처기업에 긴요한 것은 부도 위기를 돌파할 창의적 아이디어다. 평균주의는 가진 것을 적당히 나누기 위한 그럴싸한 논리는 될 수 있어도, ‘없는 자’들도 당당하게 나눠 가질 새로운 먹거리를 만들어 내는 진정한 평균주의는 될 수 없다. 오히려 경쟁과 도전을 부정하는 거대 조직, 거대 집단의 윤리적 타락이기 쉽다. 그런 점에서 평균주의는 미래를 팔아먹는 反인간주의다.

연암과 완당을 고아한 호사 취미의 먹거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연암의 법고창신과 완당의 입고출신은 그들이 여전히 살아 있는 현대의 인물임을 확인시켜 주는 말이다. 그 어느 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고유한 경지를 찾으려 한 그들의 정신은 경쟁과 도전의 대상이 전 지구화된 오늘날 오히려 더욱 절실해졌다.

평균주의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 ‘창신과 출신’은 우리에게 뼈아픈 성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무차별적 평균주의를 넘어 다양성과 창의에 기반한 진정한 평균주의를 이룩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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