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하는 인간에 대한 긍정

김재홍 시인.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 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로 시작하는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1848년 1월 서른 살의 마르크스와 스물여덟의 엥겔스가 공동으로 작성한 문헌이다.

이른바 과학적 공산주의의 원리와 원칙을 담은 가장 중요한 선언이자 고전으로써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표현과 함께 특히 도입부 첫 문장은 지난 170여 년 동안 수많은 변주를 통해 반자본 반체제 반정부를 향한 선동의 역사에서 빛나는 영광의 시간을 누려 왔다.

신성동맹(Heilige Allianz)은 국제 평화와 질서 유지를 목적으로 러시아의 차르(황제), 오스트리아 황제, 프로이센 국왕 간에 체결(1815년)된 이후 로마 교황과 영국, 터키를 제외한 유럽의 거의 모든 군주가 참여했다. 1825년 그리스 독립을 둘러싼 각국의 이해 대립으로 전 유럽적 체제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프랑스 혁명과 자유주의에 반대하며 독일, 이탈리아의 국민적 통일을 두려워했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Met´ternich, 1773-1859)는 이를 이용하여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운동을 탄압하였다. 기조(Guizot, 1787-1874)는 부르주아 체제 안정을 위해 발흥하는 노동세력의 요구를 무시하고 반대당을 탄압해 2월 혁명(1848년)을 맞아야 했다.

메테르니히와 기조 등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공산당 선언>의 파급력은 실로 막강한 것이었다. 마르크스가 직접 선언문과 규약을 작성하며 주도한 ‘제1인터내셔널’(1864년, 런던) 이후 공산주의를 표방했던 국가는 소련, 중국, 헝가리, 폴란드, 북한 등 20개국이 넘으며 이들의 영토는 전 지구의 3분의 1에 해당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능력에 따른 생산과 필요에 따른 분배’가 이루어지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 사회는 한 번도 이룩된 적이 없다.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는 궁극적으로 국가에 의한 계획과 통제와 분배가 사라지는 완전한 ‘자발성’을 기초로 하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려운 이상에 가깝다.

오히려 공산주의를 표방한 북한의 실상은 <공산당 선언>의 굴절된 결과가 어떤 상황을 야기하는지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구소련의 공산당 관료 독재를 능가하는 3대 세습(김일성 → 김정일 → 김정은) 체제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념과 전혀 무관한 사실상의 전제군주국으로 역류했음을 나타낸다. 북한은 1998년 ‘헌법’에서 공산주의 문구를 삭제했고, 2013년 ‘당의 유일사상 체계 확인의 10대 원칙‘에서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 이념을 주체사상으로 대체했다.

공산주의 운동이 부의 분배 문제와 관련해 노동자, 농민 등 경제적 약자(비자본가)의 생존권적 요구를 지적하고 그 체계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넘어, 계급론적 극단을 추구해 정치권력의 획득을 직접적으로 겨냥하거나 획득했을 때 파국이 왔음을 우리는 이미 사라진 구소련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공산주의 표방 국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을 부정하는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누구나 배고픈 삶을 싫어하고 외롭고 고단하고 힘든 삶을 꺼린다. 싫어하고 꺼리기 때문에 피곤한 몸을 움직여 쉼 없이 일하고 노력하고 희망한다. 이런 점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파국은 인간의 정당한 욕망을 정권획득의 수단으로만 삼은 결과이다. 정당한 욕망에 화답하는 정당한 보상은커녕 교조화 된 관념적 이상을 현실에 강제하는 독재 속에서 붕괴되고 말았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갖는다.’는 솔깃한 표현이 선동적 문학은 될 수 있어도 국가경영의 지침이 될 수 없음은 공산국가의 몰락으로 확인되었다. 3대 세습을 통해 이미 왕조시대로 퇴행한 것으로 판명된 북한 정권을 추종한 혐의로 헌법재판소로부터 해산이 결정된 19대 국회의 통합진보당처럼 이상을 현실과 맞바꿔 실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사태가 더 이상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새로이 시작하는 대한민국 제 20대 국회는 성숙한 자본주의에 부합하는 경제 민주화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구체적 맥락에서 실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아가 욕망하는 온 국민의 정당한 요구를 국가적 차원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각자가 헌법기관인 국회의원 모두가 힘을 기울여야 한다.

생산과 소비만큼 거래와 교환도 인간의 생존 조건에 해당된다. 생명 유지가 인간의 본능이듯 이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하려는 모든 노력은 보편적 욕망에 속한다. 어떤 곳 어떤 집단에서도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인간 조건을 거부하며 생존한 인간은 없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역사는 생산, 소비, 거래의 자본주의적 역사이다.

자본주의가 물물교환을 포함한 경제 활동에 수반되는 일체의 거래 행위를 자본과 자본의 이윤추구라는 상식적 현상으로 지칭하는 개념인 한 정당하다. 또한 인간의 경제 활동을 필수적인 생존의 수단이게끔 만드는 생체적 특성과 한계, 심리적 동인과 욕망도 역사적으로나 논리적으로 정당하다. 인간의 역사에서 자본주의는 귀납이지 연역이 아니다.

때문에 나는 <공산당 선언>으로부터 정확히 168년 상거하여 다음과 같은 지극히 상식적인 슬로건으로 정리한다. “하나의 유령이 전 지구를 배회하고 있다. - 자본주의라는 유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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